1학년, 혐관의 시작
제 잘난 맛으로 살던 고죠는 주술조건에 들어오자마자 자신만만하게 문을 쾅 하고 연다. 이상한 앞머리를 한 녀석, 단발머리. 그리고... 분홍머리. 앞의 둘은 제 동기로서 손색이 없다. 그런데, 저 녀석은 뭐지? 단련의 흔적이라고는 눈 씻고도 찾아볼 수 없는 호리호리한 몸에 어딘가 잔뜩 주눅든 모습. 다른 동급생에 비해도 보잘 것 없는 주력양. 고죠는 감히 저런 녀석을 제 동기로 인정할 수 없었다. 아니 그 이전에 저런 녀석이 반에 있어봤자 발목만 잡을 것이 뻔하고, 머지않아 주령 밥이나 될 것이 틀림없다. 고죠는 입을 비뚜름하게 내민 채, 흥 하는 소리를 내며 제 자리로 간다.
...
"야, 너 여긴 뭐하러 온거냐?"
"웩, 난 시체 치우는 취미 없거든. 알아서 꺼져."
여느 때와 같은 오후, 고죠의 일방적인 폭언이 교실 안을 울린다. 뭐, 틀린 말도 아니지. 저를 향한 악의에 전부 대응해봤자 이쪽이 지칠 뿐이다. 사야는 무신경한 표정을 지으며 가만히 창밖을 바라본다. 새학기를 알리는 벚꽃잎이 팔랑팔랑 나부낀다.
터닝포인트
사야는 단련을 시작한 이후, 놀라운 성장세를 보였다. 그동안 기회가 없었던 것 뿐, 한 번 단련을 시작하자 실력은 날개 돋친 듯 향상된다. 술식 또한 일취월장 했으나, 술식에 의존하기에는 그 한계가 분명했다. 제아무리 새로이 주어진 삶이라고는 하나, 술식을 조절하지 못해 그 반동으로 허무하게 목숨을 잃는 것은 이쪽도 사양이다. 제 죽음은 적어도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어찌보면 사치스러운 생각을 하며. 사야는 체술 훈련을 이어간다. 여느 때와 같이 홀로 더미를 상대로 체술을 갈고닦던 중, 사야에게 임무가 들어온다. 자신은 3급이고, 임무는... 역시나. 제 급과 같은 3급이었다. 별다른 긴장 없이 사야는 임무지로 향한다. 사야가 떠난 자리. 뒤늦게 초조한 표정으로 온 보조감독은 제 손에 들린 종이를 보며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다.
'신세이 사야 - 임무 등급 측정 오류. 3급 임무가 아닌 준1급으로 정정한다. 만일 파견했을 시 속히 철수, 혹은 지원을 부를 것을 지시한다.'
정갈한 문체로 적힌 글이 종이와 함께 와작, 하고 구겨진다.
...
고죠 사토루는 잔뜩 성이 나, 제 분을 못 이긴 채 길에 놓인 돌을 차며 툴툴댄다. 아침부터 임무로 뺑뺑이를 돌게 하더니, 겨우 끝내고 오자마자 듣는 소리가 이미 죽었을 게 뻔한 제 동기에게 지원을 가라는 소리다. 으, 이런건 스구루나 시킬 것이지. 그라면 이런 일에 불만 한 마디 없이 바로 임무지로 향했을 것이다. 고죠는 입을 부루퉁하게 내민 채 한 손에는 콜라를 들고 어슬렁 어슬렁 천천히 발을 옮긴다.
임무지에 도착하자, 때마침 장막이 사라지기 시작한다. 이제야 장막이 사라진다고? 고죠는 장막 안으로 들어선다. 그런 그의 눈 앞에 나타난 것은 잔뜩 상기된 표정과 어딘가 광기가 흐르는 눈을 한 채, 주령의 머리를 들고있는 사야. 온몸은 피투성이에 걸음마저 위태롭지만 그딴 것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씨익 하고 웃는다. 창공을 담은 푸른 눈과 대지를 품은 회갈빛 눈이 마주치고, 모든 것이 멈춘듯한 그 때. "늦었네?" 한 마디를 끝으로 분홍빛 인형이 무너진다.
입덕부정기
최근의 고죠는 심기가 불편하다. 어딜가나 신세이 사야, 그 녀석이 눈에 거슬린다. 자판기에서도, 체육관에서도. 심지어는 그 애가 없는 곳에서도. 별 것도 아닌 일상 속에서조차 사야를 떠올리는 제 모습에 혼란스럽기만 하다.
'좋아하는 거 아냐?'
-신세이를
말도 안된다. 그럴 리 없다, 며 고죠는 되뇌인다. 내가? 내가, 신세이를. 그 약해빠진 녀석을? 천지가 개벽해도 있을 리 없는. 스구루의 바보같은 망상이다. 그 애를 눈으로 좇는 것은 거슬리니까, 그러니까 자연스레 눈에 밟히는 것이고. 치우고 싶은 마음에 그런것이고... 아오, 스구루 그 자식은 괜한 소리를 해서. 속으로 시덥잖은 변명을 늘어놓으며 고죠는 갑갑함에 제 머리를 엉망으로 헤집는다. 저 멀리서 서류인지 뭔지 종이 뭉텅이를 든 채, 분홍빛 인형이 다가온다.
"--고죠군?"
아, 젠장.
함락당했다.
맞물리지 않는 톱니바퀴
”나랑 사귀자."
"미안해, 고죠군."
이 근래 고전에서는 둘의 이야기로 떠들썩하다. 저 고죠 사토루가 무슨 바람이 들어 저러느냐, 자신이 사야였어도 절대 받아주지 않을 것이다. 며 각자 좋을 대로 얘기하기 바쁘다. 덕분에 눈에 띄지 않고 조용히 평화롭고 자유로운 삶을 즐기려 했던 사야는 골머리를 앓고있다. 이건 대체 무슨 일인가. 신종 괴롭힘도 아니고. 맘같아서는 저 잘난 도련님의 입을 제 두 손으로 막아버리고만 싶다. 어차피 찰나의 봄바람이며 금방 식을 마음인게 분명하지 않은가. 아니, 애초에 진심인지조차 의문이다. 제 잘난 맛으로 사는 고죠군이, 저를 발목이나 잡는 장애물 취급하던 그가 제게 구애를? 말도 되지 않는다며 사야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만에 하나 진심이라고 한들, 그건 그거 나름대로 더 큰 문제다. 그는 고삼가인 고죠 가의 차기 당주이자 따라올 자가 없는 강한 주술사이다. 반면 자신은? 과거의 영광만이 있을 뿐, 현재는 멸문해버린 비술사 가문의 여식. 천애고아. 2급이라는 어중간한 등급, 사랑도 급이 맞아야 하는 게 아닌가. 저로서는 고죠군에게 어울리지 않는다, 고 생각하며 사야는 일말의 가능성마저 머릿속에서 지워버린다.
"고죠군의 마음은 잘못되어있어. 날 좋아하면 안돼."
이게 옳은 일이다. 그에게 애정을 바라는 것은 바보같은 짓이며 내게도, 그에게도 독이 되는 일일 뿐이다. 이거로 된거다. 이거로...
"-내 마음이야. 함부로 말하지마!"
"니 멋대로, 이래라 저래라 하지마. 내 감정이고, 내 마음이야. 그게 향하는 방향도 내가 정해."
--그러니까 넌 그냥 거기서 받아들일 준비나 하고있어.
널 어떻게 하면 좋을까. 그리고 난 널 어떻게 하고 싶은걸까.
머릿속이 엉망이다.
이별과 사랑
게토군의 이반. 사야는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듯 하다. 게토군은 제 첫사랑이며, 제게 처음으로 상냥하게 대해 준 사람이 아니었던가. 그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러나, 고죠군. 그에 비하면 자신의 상심쯤이야 별 것도 아닐 것이다. 사야는 그 고죠 사토루가 저렇게까지 괴로워 하는 모습은 처음 보았다.
너도 결국 사람이었구나.
제 안의 무언가가 깨지는 듯한 소리가 난다. 그것은 무엇이었을까. 편견? 고정관념? 혹은 고고한 이미지? 뭐든 어떠하리. 중요한 것은 사야가 지금. 처음으로 고죠 사토루라는 한 개체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았다는 것이다. 제가 품은 감정은 분명 연정은 아니다. 이름을 붙이자면 연민에 가깝지 않을까. 그러나 연민 또한 사랑의 한 형태라는 것을, 사야는 십분 이해하고있다. 결국, 형태는 다르지만 서로에게 마음을 품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부정할 순 없겠지. 사랑은 저주라고 했던가. 주술사란 결국 서로를 저주하며 살아가는 업. 온갖 이해관계가 얽힌 저주 덩어리에 제 저주 하나 더해진다 해서 크게 달라질 것은 없을 것이다.
사랑은 저주다.
그리고 나는 감히 너를 저주하려 한다.
러브스토리
신세이 사야의 삶은 고요했다. 그녀는 그래야만 했다. 온실 속 한 떨기 꽃이 되어, 누군가가 꺾으면 기꺼이 꺾이는 존재. 그것이 사야에게 주어진 삶이었으니. 몸을 단정히 하라. 목소리는 크게 내지 말아라. 품행을 고르게 해라. 제게 주어진 유일한 낙은 홀로 담 너머의 풍경을 바라보는것. 그것이 15세까지의 제 삶.
"사-야."
고요하던 제 세상에 멋대로 들어와버린 이. 견고히 쌓아올린 성벽을 기어코 무너뜨리고 저와 나가자며 손을 잡아 이끈 사람. 고죠는 제게 그런 사람이었다. 홀로 보던 벚꽃은 이듬해 둘이 되었고, 해를 거듭하며 일행이 늘었다.
고죠 사토루는 창공을 닮았다. 저 멀리에 있어 닿을 것 같지 않다가도 언제나 제 시선속에 자리한다. 저가 고요한 땅이라면, 그는 변화무쌍한 하늘이다. 그렇다면, 나는 너의 쉼터가 되어주리라. 네가 그 어떤 수식어도 없이 너 자신으로 있을 수 있는 작은 요람이 되어주리라.
"무슨일이야, 사토루?"
단단히 마주 잡은 손과 마주한 눈은 말로는 전할 수 없는 깊은 감정을 담고있다. 너와 나의 사이가. 점점 가까워진다.
이윽고,
입술 위로 온기가 느껴진다.
영원한 이별, 그리고 반복되는 삶
고죠 사토루의 죽음. 현시대의 그 누가 감히 그의 죽음을 상상해볼 수 있겠는가. 그는 최강이다. 세상이 그를 최강으로 만들었고, 그 또한 이를 받아들였다. 그런데, 이 알 수 없는 불안함은 뭘까. 멀리 떨어진 곳에서 너의 모습을 지켜만 본다. 항상 그랬다. 나는 널 감히 이해할 수도 없고, 그걸 바래서도 안됐다. 너는 고독했고 나는 그걸 외면할 수 밖에 없다.
-마허라.
아아, 저 잔인무도한 자는 나의 사랑하는 아이의 힘으로, 사랑하는 이를 상처입히는구나.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뭘까. 내가 어떻게하면 널 구할 수 있을까. 설령 네가 원하지 않는대도. 그럼에도 널 돕고싶은 내 마음은 이기적인 것일까. 아무렴 뭐 어떤가. 나는 성녀 따위가 아니다. 불타는 가옥을 뒤로한채, 가문 사람들의 비명을 외면하고 돌아선 그 시점부터 난 선인이 되긴 글렀다. 사랑은 저주다. 나 또한 너를 얽매는 저주가 되리라.
'영역전개.'
성공할까? 내 목숨, 내 영혼. 끊임없이 윤회하는 이 세상에서 나의 전부를 내걸은. 대규모의 술식전개. 설령 실패한대도 좋아. 네게 아주 작은 기회라도 준다면. 네가 살아만 있을 수 있다면.
잘 있어, 내 사랑. 너와 나는 여기까지겠지. 그러나 내가 남긴 저주-사랑-은 네 곁을 머물기를.
--
"-사토루?"
눈이 부실 정도로 푸르른 하늘. 시끄러운 매미 소리와, 그리운 이의 모습. 꿈인가? 아니, 꿈은 아니다. 그렇다면 제 앞의 스구루는 가짜인가? 제 육안도, 영혼도. 그것을 부정한다. 한여름의 아지랑이가 눈 앞을 일렁이다 문득, 제 몸에 남은 주력의 잔예에 정신이 든다.
-사야의 주력.
그렇구나. 너마저 날 떠났구나.
떠나간 이는 아무 말이 없다. 희미한 잔예만이 남겨진 이를 위로하듯 근처를 맴돌다 사라진다.